신립 장군의 탄금대전투에 대한 잡설 84

1. 탄금대전투에 대한 사료에서 눈여겨 볼 대목
-탄금대가 비록 들판이라고는 하지만 기병 위주의 전투에 유리한 장소는 아니었을 가능성이 높음. 대부분의 조선측 사료는 물론이고 신립 영웅론에 입각해 집필된 '도순변사신공전' 같은 사료에서조차 당시 전투가 벌어진 장소에 대해 마을 길이 협소하고 장애물이 많았을 뿐만 아니라 논까지 많아 말을 달리며 활을 쏘기엔 매우 불편했다(會値村街狹隘,且多稻田,不利於馳射)고 묘사하고 있음.

-탄금대 전투 당시 신립과 동행하고 있었으나 전투 이후 생존했던 신흠(1566~1628)의 설명도 비슷함. 신흠은 탄금대 전투 당시 지형에 대해 역시 마을 길이 좁고 장애물이 많았으며 논까지 많아 말을 달리기에는 불편했다(村街狹隘。且多稻田。不便於馳馬)고 설명하고 있음. 유사한 표현(其地村街狹隘,左右多稻田,水草交雜,不便馳馬)이 재조번방지에도 보임. 다시 말해 신립은 기병전을 위해 들판에서 교전한다고 했으나 막상 전투가 벌어진 탄금대 주변은 기병 돌격에 유리한 지형은 아니었음


-전투 경과에 대해 당시 전투를 직접 목격했을 가능성이 높은 신흠은 일본군이 조선군 좌익 방면에서 최초로 공격해 왔고, 이내 좌우에서 동시에 협공을 가해와 조선군이 통제 불능 상태에 빠져 들어 대패했다고 설명하고 있음 (逡巡之際,賊遶出我軍之左,東西挾擊,我師大亂.被賊亂砍,積尸如山,軍資軍器,一時俱盡,砬單騎至江岸,賊縱兵追之)

-전투 경과에 대해 일본측 기록인 서정일기에는 1) 조선군이 부북(충주의 북쪽) 송산 지역에 진을 형성하고 있었으며 2) 조선군 병력은 수 만 명 3) 조선군 진영에 먼저 돌입한 일본군 병력은 대마도(對州) 종의지 계열 병력이며 4) 일본측 전과는 참수 3000명, 포로 수백명, 조선 대장 신입석(혹은 입) 전사라고 명기하고 있음. 전투 경과에 대한 설명은 없음

-간접적인 일본측 기록이라고 할 수 있는 프로이스의 일본사는 1) 조선군 병력이 8만이고 대부분 기병이었으며 2) 조선군은 달 모양의 진형을 펼쳤고 3) 조선군은 중앙을 공격하면서 포위하려 했으며 4) 일본은 조선의 양익에 조총으로 집중 사격을 가하자 5) 조선군은 후퇴했다가 다시 1~2차례 더 공격을 시도하다가 5) 일본군이 조총은 물론 대도까지 동원해 조직적으로 반격하자 조선군이 붕괴했으며 6) 당시 일본군이 사살한 조선군의 규모는 8000명이라고 언급하고 있음

-당시 조선군이 기병이 주력이었을 가능성은 여러 자료로 확인할 수 있음. 당시 전투 현장에 있었던 신흠은 전투 전 신립 장군이 "저쪽은 보병이고 우리는 기병이니 넓을 들판으로 유인해 기병으로 몰아치는 것이 좋겠다" (砬以爲彼步我騎,迎入廣野,以鐵騎蹙之)고 말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고, 당시 조선군은 기병이 주력이라는 유사한 설명(況彼步我騎,所長在於陸戰,只當迎入廣野,以鐵騎蹙之)이 신립 장군의 전기인 도순변사신공전에도 나옴. 프로이스의 일본사에도 조선군 대부분이 기병이었다고 언급하고 있음


2. 조선 전기 기병의 특성 문제와 일본의 대기병 방어력
-15세기초 하경복 진서에 따른 이론적 병종 비율에서 조선군 창기병은 전체 병력의 20%, 기병 중 50% 비율이며, 1차 함길도 진법에 따른 창기병은 기병 중에서 33%, 2차 함길도 진법에 따른 창기병은 기병 중 20%, 문종 신진법에 따른 창기병은 기병 중 40%였음

-하지만 세조 이후 조선군의 검열 및 진급 시스템이 철저하게 활 위주로 재편되면서 기병들은 활로 무장한 궁기병 위주로만 운영되었음. 임진왜란 직후에 편찬된 무예제보에서 "말 위에서 창을 쓰는 것은 비록 무과시험장에선 쓰이지만 그 방도가 상세히 갖추어지지 않아 창과 칼이 버려진 무기가 된지 이미 오래다"라고 설명한 것은 그 같은 상황을 잘 보여주고 있음.

-당연히 임진왜란 중 조선 기병도 기본적으로 활로 주무장한 기병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음. 신립의 전기인 도순변사신공전에서 탄금대 전투의 전장 환경을 설명하면서 일반적인 기병의 돌격을 의미하는 치돌(馳突)대신, 궁기병의 돌격 사격을 의미하는 치사(馳射)란 표현을 쓴 것도 그런 관점에서 음미해야할 것임.

-일본의 군사사 연구가인 스즈키 마사야는 오다 노부다가의 3단 철포가 허구라는 주장을 펼쳤고 이같은 주장은 일본 뿐 아니라 국내에서도 광범위하게 받아들여지고 있음. 하지만 오다 노부다가의 3단 철포가 허구라고 해서,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이 3단 철포를 구사하지 않았다고 볼수는 없음.

-전쟁 중 조선의 국왕 선조가 일본이 만약 조총을 3단으로 연속사격할 경우 어떻게 이길 수 있겠는가(若分三運, 次次放砲, 迭爲先後, 則何敢當哉)라고 직설적으로 언급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임란 직후 문신인 정온(1569~1641)이 구상한 전투대형인 삼첩진에서도 조총의 연속 사격 개념에 대해 완전히 인지하고 있는 것으로 볼 때 임란 당시 일본군이 이같은 조총의 연속사격 시스템을 사용했을 가능성은 매우 높음.

-물론 일본 전국시대의 전투에서 기병의 역할은 미약했으며, 이같은 대기병전 경험 부족 때문인지 임란 당시의 일본군이 기병에 고전한 사례도 몇차례 발견됨. 특히 도산전투 장면을 목격한 조선의 이시언은 마귀 휘하의 명군 달자(몽골계) 기병 200명이 편곤으로 일본군을 강습하자, 일본군이 조총 쏠 시간도 없이 패전했다고 언급하면서 일본군이 마치 조선군이 도망가듯이 도망가더라고 강조하고 있음 (麻貴所率㺚子二百餘名,皆持環鞭,亂打如雨疾雷,不及掩耳,銃筒亦不暇放.賊兵之走,亦如我國人之走)

-하지만 임진왜란 당시 조선의 기병이 기본적으로 정면 돌격에 제약 사항이 있는 궁기병이었고, 일본군이 이미 조총의 3단 연속 사격을 통해 사격 공백을 최소화시킬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었다고 볼 때 탄금대전투 당시 조선군 기병이 정면돌격을 감행한 것은 합리적인 교전 방식이라고 보기는 힘들어 보임. 차라리 궁기병의 최대 장점인 Hit and Run이나 적 대형 측방이나 후방에 대한 기습적 공격이 더 효율적이었다고 판단됨.



* 임진왜란사 p50의 탄금대전투 설명의 출처 문제
전편위 임진왜란사 탄금대전투 설명이 끝나가는 부분에서 각주 35로 출처를 연려실기술로 표기하고 있는 것은 사실임. 하지만 이것은 탄금대전투에 관한 기본적인 사료가 연려실기술이란 의미이지 3차례에 걸친 기병 돌격에 대한 묘사의 출처가 연려실기술이란 뜻은 아님. 이미 알려져 있듯이 이 기병 돌격에 대한 설명은 이X석 장군의 임진전란사가 출처임


* 임진전란사 탄금대전투 부분의 묘사
이X석 장군의 임진전란사 시리즈(1967년판 2권본 임진전란사 상권 p269 및 1974년판 3권본 임진전란사 상권 p269, 1994년판 4권본 임진전란사 상권 p269)는 모두 당시 신립의 총병력이 9000명이며 기병 1000명 1차 돌격, 기병 1000명 2차 돌격, 기병 2000명 3차 돌격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결국 병력 소진후 패배했다는 줄거리로 설명하면서 각각 돌격 순간의 상황에 대해서까지 매우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음.


* 임진전란사 탄금대전투 설명의 출처 문제
-이X석 장군이 탄금대 전투를 설명하면서 사료로 명시한 책은 선조실록, 은봉전서, 상촌집, 재조번방지, 국조보감, 우암집, 민씨임진록 등임. 여기에 거론한 사료 중 (민씨 임진록을 제외하면) 3차례에 걸친 기병 돌격과 그에 따른 병력 배분을 구체적으로 언급한 사례는 전혀 없음. (막연하게 몇차례 기병 돌격을 시도했다는 언급은 있음)

-이상의 사료를 제외하면 유일하게 후보로 남는 것은 결국 민씨임진록 뿐임. 다시 말해 이X석 장군의 탄금대 전투 묘사 부분이 창작이 아니라고 가정한다면 그가 인용 출처 중 하나로 표시한 민씨임진록에서 인용했을 가능성이 높음. 하지만 민씨임진록의 정체는 조금 모호함. 임진록이란 제목의 책 중에서 사료로 이용되는 것은 류진의 임진록 뿐인데, 류진의 임진록에는 위와 같은 설명이 나오지 않음.

-류진의 임진록을 제외한 나머지 현존 임진록 50여 종은 모조리 군담류(쉽게 말해 소설류)로 취급되는 책들 뿐임. 실제로 이장군의 임진전란사의 탄금대전투 묘사 부분은 군담소설적 색체가 농후함. 결국 이장군이 인용한 민씨임진록도 군담류 임진록일 가능성이 있음. 

-
다만 군담류 임진록은 판본이 너무 많고 판본간 편차가 너무 커서 이장군이 인용한 민씨임진록을 정확히 특정하기는 힘듬. (판본에 대한 조사가 필요함) 결국 이장군이 묘사한 탄금대 전투의 구체적 내용은 전설의 영역이라기보다는 소설의 영역에 가깝다고 판단됨. 다만 조선군이 서너 차례 기병 돌격을 시도했다는 기본적 사실은 프로이스의 일본사 등에서 교차 확인 가능함.



& 요약
-신립 장군은 조선군 기병이 일본군 보병과 넓은 들판에서 싸우면 필승이라고 인식했음
-탄금대 주변은 들판이기는 했으나 기병에 유리한 지형만은 아니었음
-조선군은 정면공격에 제한사항이 적지 않은 궁기병으로 최대 3차례 정도 정면 돌격을 시도했으나 조총으로 무장한 일본군 보병에게 양익을 강타 당한 후 진형이 와해되어 패전함


루뎅님 글-신립의 능력에 대한 의혹, 혹은 음모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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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케치경감의 탁상공론 : [서평] 조선전쟁 생중계 - 그 독특한 구성 2011-09-19 23:38:58 #

    ... 불완전한 커뮤니케이션이기도 하구요. ^^첫 메일은 탄금대 관련 부분이었는데, 제 소관이 아닌거 같아 번동아제님을 소개시켜드렸네요(http://lyuen.egloos.com/4952497). 뭐, 한참 지난 뒤에 보낸 답장이라 아무 도움도 못됐지만;;;이 후 몇 번 쪽지, 메일, 블로그의 안부게시판로 대화가 ... more

덧글

  • Luthien 2009/05/21 00:54 # 답글

    오오, 역시 제대로 정리해 주시는군요. 감사합니다~ ( 'ㅁ')/
  • 번동아제 2009/05/28 02:25 #

    신립군의 총 병력 규모 등 난제가 많아서 탄금대 전투는 여전히 어려운 것 같습니다. 함경도쪽 기병전과 수성전 위주로 전투 경험을 쌓아왔떤 조선군이 조총을 앞세운 일본군과 야전에서 격돌패 패전한 매우 상징적인 전투라 연구 필요성은 높지만 사료간에 모순이 너무 심해서 더욱 어려운 것 같습니다.
  • 슈타인호프 2009/05/21 00:58 # 답글

    "마치 조선군이 도망가듯이 도망가더라"는 대목에서 왜 안구에 습기가 차는 걸까요(...)
  • Luthien 2009/05/21 01:00 #

    저도 안구에 이과수가...
  • 네비아찌 2009/05/21 10:02 #

    저도 안구에 천지연폭포가....
  • 행인1 2009/05/21 10:19 #

    전 나이애가라 폭포가....
  • Mr술탄-샤™ 2009/05/21 12:28 #

    저는 안구에 증류수가....
  • 아빠늑대 2009/05/21 13:37 #

    ㅠ.ㅠ
  • Allenait 2009/05/21 19:21 #

    ..저도 눈물이 납니다
  • 천지화랑 2009/05/21 22:10 #

    저는 안구에 황천1급이;;;;
  • 야채 2009/05/26 02:37 # 삭제

    그것도 일본인이 아닌 조선인 스스로의 표현이라니... T_T
  • 뚱띠이 2009/05/27 12:57 #

    저도 눈물이...ㅠㅠ
  • 번동아제 2009/05/28 02:26 #

    저는 위안을 받았습니다만 -_-
  • anaki-我行 2009/05/21 01:02 # 답글

    역시 깔끔한 정리입니다...^^
  • 번동아제 2009/05/28 02:28 #

    기병전술 포스팅은 잘 보았습니다. 말씀처럼 말을 달리는 중에 활을 쏠 때는 사거리가 매우 가깝죠. 다만 이 같은 무과시험의 규정이 실제 전술을 반영하는지는 조금 고민해 볼 필요는 있을 것 같습니다.

    이를테면 궁기병의 장거리 사격은 말이 정지한 상태에서 하기 때문에 일반 활쏘기와 큰 차이가 없어서 무과시험에서는 이 종목을 따로 시험보지 않았던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들구요.

    어찌됐던 간에 지적하신 문제는 조선 시대 궁기병의 전술과 관련해서 매우 중요한 문제라는 것이 분명합니다.
  • 초록불 2009/05/21 01:25 # 답글

    잘 보았습니다.
  • 번동아제 2009/05/28 02:28 #

    감사합니다
  • 한단인 2009/05/21 02:07 # 답글

    어.. 어라.. 그러니까 기병 '돌격' 인데 그 기병 대부분이 궁기병일 가능성이 높다는 거죠?

    ...이건 뭐, 섶을 지고 불구덩이에 뛰어드는 꼴?
  • ㅇㅅㅇ 2009/05/21 02:39 # 삭제

    그런데 기병은 단순히 말에 깔리는것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위협적이지 않을까요?
  • 한교 2009/05/21 07:09 #

    말에 깔리는건 좀.. 그렇고.. 치사 라고 했으니..

    근데 그건 제껴두고 지형이 에러라서 궁기병이 좋은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네요.

    뭐랄까.. 밀리터리 괴담중에 한국지형은 논두렁이라 전차가 기동하기 힘들때문에 m48이 최고다 라고 주장하는 어떤분이 생각이..

    근데 그것보다 일단 궁기병위주로 편성됐다면 참 대단한건데... 지형문제때문에 제 힘을 완전히 발휘하지 못했었군요..ㅜㅜ
  • 번동아제 2009/05/28 02:29 #

    정면 돌격만 아니라면 (측면, 후방 등) 충분히 공격 성공 가능성도 있을 것 같습니다만 탄금대의 경우 후방에 강을 둔 배수진이라 정면돌격 외에 기병의 장점(속도를 이용한 우회나 배후 포위)을 활용한 작전이 어려웠을 것 같습니다.
  • 뷁하 2009/05/21 03:20 # 삭제 답글

    잘 읽었습니다. 치돌 대신 치사라는 표현을 썼군요.
  • 번동아제 2009/05/28 02:30 #

    전반적인 맥락을 봐야하는 터라...그 표현 단독으로 큰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좀 부담스러울 지도 모르겠습니다
  • 하늘늑대 2009/05/21 08:11 # 답글

    늘 잘보고 있습니다. :)
  • 번동아제 2009/05/28 02:30 #

    감사합니다. ^^
  • asianote 2009/05/21 08:15 # 삭제 답글

    차라리 농성전을 주력으로 하고 치고 빠지기를 했다면 좀 더 나았겠군요.
  • 번동아제 2009/05/28 02:32 #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조선군의 전투기록을 보면 수성전(진주성,연안성 등)에서 좀 더 중대형의 화약무기를 사용했으므로, 조총의 이점을 어느 정도 상쇄할 수 있을 것이고 조선군의 병종 특성(장병 위주)에도 부합했을 것 같습니다.

    동시에 궁기병을 활용해 보급부대를 습격하거나 적이 이동중 대형을 형성하지 못했을 때 기습공격을 가했다면 다시 말해 의병들의 공격 패턴을 관군 궁기병이 활용했다면) 좀 더 효과적으로 전투를 수행할 수 있었을 것 같습니다.
  • 이준님 2009/05/21 08:59 # 답글

    조선왕조 5백년 임진왜란편은 도망병 문제때문에 탄금대를 전장으로 택했고 제작비의 압박과 기록의 미비(?)나 여러 정황때문에 탄금대 전투를 "나레이션"으로 처리했습니다. 이때 신립으로 나온 분이 "무풍지대"에서 김두한이었고 알바트로스에서 강리나 아버지였지요.

    실제인지 궁금한데 이 드라마에서 신립은 수 틀린다고 부하를 마구 마구 손수 찔러죽이는 인간으로 나옵니다. --;;
  • 제노테시어 2009/05/21 10:33 #

    사료에서, 탄금대 전투 전날에 충주성에서 머물면서 정찰차 군관을 보냈는데 그 군관이 돌아와서 '적이 이미 문경새재를 넘었다.'라고 보고하니까 신립이'화들짝 놀라더니 칼을 뽑아 '군중을 놀래킨다'고 그 군관을 참수했다는 기록이 있는걸로 압니다. 아마도 그 기록에 영향을 받은게 아닐런지...
  • 시쉐도우 2009/05/21 21:53 #

    실록에서 얼핏보기론, 임진왜란 전 신립이 병사로 있을 때에 군졸을 참한 사건도 있었습니다. 사유는 현재로 치면 '상관모욕죄' 정도 였던 걸로...

    군문이라고는 하지만 전시도 아닌 평시에 그렇게 했던지라, 사간원과 사헌부에서 탄핵이 들어와서 체직된 적이 있는 걸로 압니다. (양사에선 국문을 열자고 했으나, 선조는 그것은 반대...) 물론 신립은 나중엔 다시 고위직으로 복귀했습니다.

    사형은 원칙적으로 임금의 재가를 받아야 하는 조선시대 법제도에서는....
  • 번동아제 2009/05/28 02:33 #

    당시 조선 군인들이 참수로 군기를 잡으려 했던 경향이 농후했던 것 같습니다. 신립도 그런 관습에서 자유롭지 못했구요.
  • 에르네스트 2010/01/01 09:26 #

    충무공 이순신께서도 원체 처형으로 군기를 잡으셔서 전투전사자보다 군율에 의해서 처형당한 숫자가 더 많다는 소리까지 나오는 판이죠.
    전투전사자< 군율에의 한처형
    전투전사자< 역병걸려 죽은병사 숫자
  • .... 2010/01/25 09:31 # 삭제

    '충무공께서도' 라기보다 '충무공이라서' 일지도 모르죠. 탄금대 전투 같은 패전이라면 아무리 처형을 많이 해도 전사자를 따라잡기는 무리일 테니...
  • FELIX 2009/05/21 09:08 # 답글

    임진전란사의 탄금대 부분의 원사료가 소설이었다니! 나의 임진전란사는 그렇지 않아!

    who sad....
  • 번동아제 2009/05/28 02:34 #

    소설로 추정된다는 것이지, 소설이었다라고까지 단언하기엔 아직 좀 부담스럽네요. 사실 민씨임진록을 구체적으로 특정하지는 못한 상태라...
  • 萬古獨龍 2009/05/21 09:26 # 답글

    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병과가 그냥 기병이 아니라 궁기병이었군요...
  • 번동아제 2009/05/28 02:34 #

    궁기병이 주력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정도가 가능한 표현이겠군요.
  • 들꽃향기 2009/05/21 09:46 # 답글

    잘 읽고 갑니다;; 그 사료가 그나마 신립 행장록 같은데에서 나온걸로 생각했는데;; 민씨임진록...;; 이었다니요...;;
  • 번동아제 2009/05/28 02:35 #

    저도 신립쪽 관련 행장, 행록을 관심있게 뒤졌는데 그런 내용을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 네비아찌 2009/05/21 10:03 # 답글

    처음 이 문제를 제기할때는 그저 궁금증을 말한것 뿐인데 이렇게 번동아제님까지 나오셔서 정리를 잘 해주시니 정말 감사합니다.
  • 번동아제 2009/05/28 02:35 #

    저도 감사합니다
  • 2009/05/21 13:04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구들장군 2009/05/21 13:37 # 삭제 답글

    저.. 좀 궁금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왜군이 문경새재를 넘어서 내려올 때, 밑에서 불을 질렀다면 어땠을까요? 험한고개 넘어오느라 힘들었는데, 불길을 피해 다시 올라가야 한다면 꽤 애먹었을 것 같아서 드는 생각입니다.

    쓰고보니, 좀 어이없는 질문이군요... ^^;;
  • 번동아제 2009/05/28 02:36 #

    새재쪽 주변 일대에서 화공을 시도하는 것도 한번쯤 생각해볼 방법인 것 같습니다만...새재를 넘어와서도 통로가 협소해서 다양한 공격을 시도해 볼만한 지형이라고 판단됩니다.
  • 델카이저 2009/05/21 14:23 # 답글

    아마 함경도 여진족 생각하고 그냥 한 두 번 밀어 붙이면 그냥 흩어질 거라고 생각했던게 아닐까 싶습니다. -_-;;
  • 번동아제 2009/05/28 02:37 #

    네 저도 그런 생각이 듭니다. 국가 대 국가의 정규군 회전에 대한 감각이 부족했던 것은 아닌지... 함경도 여진족과 상대할 때처럼 단기결전에 의한 기선 제압 정도의 기분으로 전투에 임한 것 같단 생각도 듭니다.
  • 길 잃은 어린양 2009/05/21 16:56 # 삭제 답글

    이형석 장군의 저작에서 탄금대 전투에 대한 세부 서술은 소설에 가깝다니 아쉽습니다. 예전에 읽었을 때는 서술이 제법 자세해서 어떻게 재구성 한 것인지 궁금했었는데 근거가 부족했군요;;;;
  • 번동아제 2009/05/28 02:38 #

    네 현재로서는 출처가 애매한 이야기 같습니다. 일본쪽 기록도 프로이스 일본사 외엔 좀 소략해서 그쪽 자료라도 조금 더 나오면 좋겠습니다.
  • 이준님 2009/05/21 17:33 # 답글

    그러고 보니 비슷한 책에서 한산도 대첩부분이 무려 "조선수군이 왜선에 등선해서 육박전을 하는" 서술로 된것도 있었지요. 이 부분도 단순히 백병전이 아니라 삼국지나 수호지에 가깝게 싸우면서 환담하는 그런 서술인걸로 압니다.(이것도 소설같은 생각이 듭니다.)

    기억이 맞다면 귀선(거북선) 장이 손수 왜선에 뛰어드니 장수 하나가 활을 쏘다 멈추고 하하하. 거북은 그냥 내려오거라~운운하는 걸로 압니다만.
  • 번동아제 2009/05/28 02:38 #

    네 이X석 장군님이 쓰신 내용 중에 그냥 이야기 쓰듯이 좀 과하게 윤문했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 Allenait 2009/05/21 19:20 # 답글

    궁기병이었군요! 그냥 단순히 '기병' 으로만 표기된 문헌이 많았는데..

  • 번동아제 2009/05/28 02:39 #

    네 기록상으론 궁기병이라고 명시되지는 않았지만 임란이전 함경도 기병들의 교전기록, 무예제보의 창기병에 대한 설명 이런 대목을 종합해 볼때 궁기병이 주력이었을 개연성이 높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것도 어디까지나 추정의 영역이라 좀 더 세부적인 논증과정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 천지화랑 2009/05/21 22:12 # 답글

    활로 타격한다면(응?)
  • 번동아제 2009/05/28 02:39 #

    활로 때리는 겁니까? ^^
  • 일화 2009/05/21 22:42 # 삭제 답글

    역시나 세부묘사는 소설일 가능성이 높은 거로군요. 깔끔한 정리 잘 봤습니다.
  • 번동아제 2009/05/28 02:40 #

    사실 추가 사료가 나오기 전에는 좀 단정하기 힘든 대목도 있는듯 합니다. 다만 돌격 순간에 대한 구체적 묘사는 확실히 군담소설에 근거했을 가능성이 높을듯...
  • 루드라 2009/05/22 13:18 # 답글

    몰랐던 부분을 알게됐네요. 감사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
  • 번동아제 2009/05/28 02:40 #

    감사합니다.
  • 2009/05/23 10:55 # 삭제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번동아제 2009/05/28 02:40 #

    한번 연락드리겠습니다. 아직 모르고 있었습니다
  • 돌람팔 2009/05/23 19:18 # 삭제 답글

    오직 궁기병으로만 구성되었다면 실전에 약점이 되겠는데요. 몽골군조차 2/5는 돌격용 중기병으로 구성했는데,
    궁기병들의 활은 보병의 활보다 사거리가 짧아서 근접하지 않으면 큰 효과를 얻기 힘들죠.
  • 번동아제 2009/05/28 02:42 #

    네 그 때문에 조선 초기에 병법에 의한 이론적 병종 비율에서는 창기병의 비율이 상당했죠. 점차 창기병이 빈약해지고 궁기병 위주로 발전한 것은 확실한데 임진왜란 당시 창기병/궁기병의 구체적인 비율을 제시하기에는 아직 사료가 부족한 것 같습니다.
  • 瑞菜 2009/05/23 20:13 # 답글

    좁은 입구에서의 럴커 디파일러 수비보다,
    넓은 센터에서 저글링, 럴커, 디파일러의 한방 쌈싸먹기를 시도했지만,
    상대는 베슬 갖춘 2-2업 바이오닉이라.....
  • 번동아제 2009/05/28 02:43 #

    네 그짝이었던 셈이죠. 차라리 좁은 입구를 틀어막았더라면 하는 전통적 견해에 더 무게를 두고 싶습니다. 그게 싫다면 좀 더 자유로운 공간에서 일본군이 전투대형을 형성하기 이전 이동대형 상황에서 측면이나 후방을 기습공격하는 것이 현실적이었을 것 같습니다.
  • 뚱띠이 2009/05/27 12:59 # 답글

    넓은 지역인것만 확인하고 그 지역의 현상태르르 무시했던 작전이었군요
  • 번동아제 2009/05/28 02:44 #

    대충 탄금대 주변을 전장으로 지정하긴 했는데 구체적으로 정확하게 자신이 원하던 위치에서 교전하지는 못했던 것이 아닌가하는 의문도 듭니다. 배후에 강을 두고 들판에서 싸우겠다 정도의 결심만 한 상태에서 돌발적으로 교전에 돌입한 것이 아닌지하는 느낌을 받습니다.
  • 그림사랑 2009/06/26 18:05 # 답글

    궁금하것이 있습니다.
    이글과 트랙백 된 글들을 읽으니 조선기병이 원거리에서 활을 쏘고 치고 빠지는식의 전투를 하지도 않았고 서양식 중기병의 돌격도 아닌, 마치 삼국지에 나오는 장수들간의 1:1교전 처럼 훈련을 받았다는데, 시밎어 전투시 하마를 하는 기병이 우린 기병, 저들은 보병이니 평지에서 돌격하면 된다는 생각을 했다는것이 뭔가 이상합니다.
    우리가 평지에서 돌격한다는 것 자체가 돌격이 아닌 것 같은데 실록에도 그렇게 나온다 하니 그 의문이 더욱 커지는 군요
  • 허허허 2009/08/14 10:31 # 삭제 답글

    적의 병력수와 전투 경험, 병종의 성향을 모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치더라도, 자기 주력 병종의 장점 무시, 후방부의 요새 가치 무시, 심지어 탄금대의 지형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전군을 휘몰아 몰살시키다니....이런 자가 조선의 유망주라니...조선에는 제대로 된 대장 없다라는 표현을 써도 무방할 것 같군요. 안습 그자체입니다. ㅠㅡ
  • 근위연대 2009/10/09 13:11 #

    조선이 국가간의 대규모 회전이 없었다는 경험의 부재가 아닐까 합니다. 실상 제가 '증보제승방략'의 신립의 활약을 보니까 다른 건 몰라도 정말 용맹한 지휘관인 것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이런 자신감과 그리고 어느정도 조급함이 방어보다 공격을 선택한 게 아닌가 싶네요. 그리고 반드시 그 지형에서 싸울려고 했다기 보다는 저번에 번동아제님 말씀처럼 갑작스럽게 조우해서 싸우게 됐을 가능성도 있다고 합니다.
  • 근위연대 2009/10/09 13:12 #

    그리고 신립 말고도 조선에 훌륭한 장수들은 꽤 있었지 않습니까? 신립이야 북방에서 그 전공을 증명한 장수였지만 임진난 당시에 육전에서도 활약을 보인 장수들도 많았는데 굳이 조선에는 제대로 된 대장이 없다고 하기에는 좀 과한 표현이 아닐런지요.
  • 하정학 2009/11/18 13:48 # 삭제 답글

    궁금한게 있는데,
    조선은 어째서 궁기병 체제로 넘어가게 되는지 알수 있을까요??;
  • 우와아아앙 2009/12/23 23:42 # 삭제 답글

    궁기병대의 돌격이라... 묘하게 서양의 카라콜 전술이 겹쳐보였습니다...
    뭐 실제 운용방식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는 듯 싶지만요.
  • 야혼트 2009/12/24 19:16 # 삭제 답글

    궁기병이라고 해도.. .. 단순히 경무장 기마 궁사가 아니라
    갑주와 창검을 겸해서 소지한 기병들이었을 가능성은 없는건가요?
    유목의 경무장 기병이라고 하더라도 활만 들고 다니는건 아니고 철퇴랑 기병도를
    소지해서 다닌것처럼 말이죠.

    기록에 언급된 치사란것도 창검을 들고 돌격을하기위해 접근하기 전까지
    견제용으로 쓰는상황이 아닐런지..

    그렇다면 그렇게 비상식적인 전술은 아니였을텐데 말이죠....
    아무리 머리가 왕짱돌인 전술가라고 하더라도..
    활로만 무장한 궁기병들한테 적진돌파를 시키진 않았을거 같아서요...
  • 번동아제 2010/01/28 23:51 #

    조선군의 무장 패턴으로 보아 칼 정도는 소지했을 것으로 봅니다만, 활을 주무장으로 한 기병이 창까지 소지했을 것이라고는 셍긱힞; 않습니다. 설사 그렇게 가정해 봤자 창을 쓰는 법이 잊혀졌다는 한교의 평을 생각하면 의미를 부여하기도 힘들겠지요.
  • 곰돌군 2010/08/02 23:48 # 답글

    여러가지로 정황을 종합해 보면.. 적지를 종심으로 깊게 돌파해 들어오는

    적의 대군을 처리하는 방식중에서 제일 하수라는.. "일대 회전으로 한방

    승부" 를 택했다는 이야기가 되는군요. 성공만 하면야 가장 깔끔하고

    후유증도 적다지만... 그것참, 이건 다른것보다 신립이라는 장수가 실제로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대군을 지휘해 본 경험이 얼마만큼 되는가가 문제

    가 아니었을지..
  • 번동아제 2010/08/12 03:58 #

    네 함경도 국경 수비 경험이 국가 대 국가의 정규군끼리의 회전에 그대로 적용하기에는 어려움이 많았는데....전자에 두각을 나타낸 사람이 후자에도 활약할 것이라고 기대한 인재 운용 시스템 자체가 에러죠...
  • 왕대갈 2013/01/04 09:39 # 삭제 답글

    충주칠금동 탄금대살고있는 사학도입니다;;
    큰 오류가 하나있는 것 같습니다
    충주댐이 생기기이전 신립장군이진영을 구축한 탄금대산은
    당시에는 '섬'이었습니다 저희 할아버지와 아버지 모두 탄금대출신인데 모두 옛날만해도 달래강과 남한강이 합류하는 섬이었다고 말씀하십니다
    다리가 생기기전까지 나룻배로 통학하셨다구요....
    지금이야 육지가 드러나서 논이 많지만...
    저희동네얘기나와서 쓰고갑니다^^;;
  • 번동아제 2013/01/04 17:01 #

    설명 감사합니다만 왕대갈님도 제 글의 취지를 약간 오해하신 것 같습니다.

    기병이 작전하기에 부적합했다는 탄금대 현장 지형에 대한 제 글의 묘사는, 현재의 지형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당시 참전자의 목격담에 근거한 것입니다.

    그러니 수십년 전의 지형이 어떤 상태냐와는 논의의 평면이 다릅니다. 저는 현재 지형을 근거로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 당시 전투 현장을 실제로 목격한 사람의 말을 근거로 이야기를 했으니까 말입니다.

    이와 별개로 전투가 벌어진 구체적인 지형을 특정하는 과정에서 왕대갈님의 설명은 매우 유용하리라 판단됩니다. 댓글 감사합니다.
  • 왕대갈 2013/01/04 10:10 # 삭제 답글

    추가적으로 동남쪽으로 중원평야가 펼쳐져 있고 북쪽으로는 중원고구려비,중앙탑,과거 장미산성과 보련산성으로 추정되는 산성 여러곳이 길게 뻗어 있으며 일본군이 접근하는 모습을 섬 꼭대기에서 한눈에 관측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였습니다
    북쪽으로는 마애석불로 건너가는 대형나루터가 있었으며 중원평야 방향으로는 기병이 빠르게 도하가능한 너무 깊지 않은 강이 넓게 뻗어 있었습니다
    다만 우기에 범람이 심했다고 합니다. 70년대 충북대홍수때 많은 탄금대 사람들이 섬에 갇혀 죽었다고 합니다
  • abcd 2015/02/22 01:37 # 삭제 답글

    천운 지운 인운이 안 따라 준게지...
  • abcd 2015/02/22 01:44 # 삭제 답글

    활기병이 아니라 창기병이어야 했다.
  • abcd 2015/02/22 02:05 # 삭제 답글

    당시 왜군은 보병 위주였기 때문에...
    경장갑 활기병 몇 기만 돌격 차징해도 보병 흩트리는 건 문제도 아니다.
    ...
    라고 생각했다가 죽었다.
  • 질문이요 2015/03/31 22:15 # 삭제 답글

    당시 신립은 북방의 자기 기병대를 이끌고 온 게 아니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차출된 기병들의 훈련도가 낮아 기마사격이 가능한 자가 오히려 없어서 창기병 돌격을 하려 한게 아니었을까 하는 내용의 책을 본 적 있는데요. 이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 헐퀴 2020/07/23 18:03 # 삭제

    블로그 주인장도 아니고 몇년이나 지난 글이긴 하지만 지나가다가 답변을 하자면 그 당시 신립은 야전사령관이 아니고 변란을 대비하여 전국을 돌며 병력을 점검하고 있었던 것으로 알 고 있습니다. 즉 직속부하를 거느리고 있는 위치도 아니었고, 제승방략하에서 어차피 각 지방 군은 편제만 되어 있고 비상시 소집하고 중앙에서 지휘관이 임명되어 내려오는 방식이었기에 그게 변명이 되진 않습니다. 물론 북방병력이 소규모 나마 실전을 겪은 부대들이라 조금 나았을지는 모르지만. 그리고 신립이 지휘한 병력이 기병 2~3천에 8천정도가 보병으로 구성되어 있엇고 기병들은 대부분 수도 직속의 정예부대입니다. 왜냐하면 그당시 기병은 필마는 본인이 자비로 구입해야 했고, 애초에 병종이 기병으로 시작되기 때문에 보병 8천은 몰라도 기병은 정예였을겁니다. 그리고 여러 사료를 봐도 신립이 거느리고 있던 기병은 궁기병이 대부분입니다. 애초 이일등이 계획, 배치한대로 문경세제에 모집한 보병 8천명중 일부를 증강시켜 매복에 임하고, 4천은 예비대로 충주성에 입성시켜놓은 상태로 본인은 기병 2~3천기를 가지고 궁기병의 기동성을 살려서 문경세재 너머 다가오고 있던 고니시군에 고속유격전을 걸고 치고빠지면서 피로도를 강요 했었어야 합니다. 문경세재는 험한 지형이고 외길이기 때문에 설령 매복한 부대가 밀리더라도 피해를 최소화 하면서 후퇴가 가능하고 후퇴하면서 지연전 펼치는 것도 가능해서 최대한 피로를 강요한 다음 충주성의 보병대와 합류하여 농성을 하며 잡아두고 측면이나 후면을 궁기병대로 괴롭혔으면 뒤따라 오던 가토가 합류하기 전에 충분히 고니시의 예봉을 꺽을 수 있었고, 승리까지는 어려워도 몇일 정도는 지연전을 펼쳐서 8도 근왕군들이 집결할 시간 & 수도방어준비 시간은 벌어줬을테고, 허무하게 정예병력을 전멸시켜서 조선군 사기를 저하시킬 일도 없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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