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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06월 27일
![]() 신라 사천왕사지 출토 부조물에 나타난 갑옷 모습 (직접 촬영) 한국 군사사를 공부할 때 가장 큰 문제는 역시나 자료 부족이다. 갑옷도 예외가 아니어서 빈약한 실물 유물을 상대로 거의 사투를 벌여야 한다. 갑주 연구에 있어서 불교 문화재의 가치를 따지기에 앞서 아래의 표를 우선 살펴 보자. ![]() 삼국시대 갑주 양식 변화 (직접 촬영) 지난 2002년 한국 고대의 갑옷과 투구 특별전에 나온 이 설명 패널은 삼국시대 갑주 양식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이 표에는 찰갑류가 하나도 나오지 않는다. 당시 고고학계에서 삼국시대 찰갑의 양식 변화나 그 연대에 대해 아직까지 뚜렷한 가설조차 세우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단 1점도 출토 유물을 토대로 원형 복원에 성공한 적 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국내에서 삼국시대 찰갑 추정 모형을 제작한 사례가 두 건 있으나 하나는 전시용 모형을 만들기 위해 벽화를 토대로 제작한 것이고 하나는 일본 출토품을 토대로 일본 학계에서 복원한 것을 그대로 다시 흉내내서 만든 것이다. 어느 것이나 복원 보고서나 혹은 고증 보고서도 없이 만든 모형이었다. 다시 말해 학술적 가치가 없는 것들이다. 이 특별전이 열린지 7년이 지났지만 전체적인 모양새를 어느 정도 복원 할 수 있는 삼국시대 갑옷은 대체로 위 설명문에 적혀 있는 연대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다시 말해 아직까지 300년 이전, 550년 이후의 삼국시대 갑옷에 대해서는 우리가 가진 자료가 거의 없다. 그나마 찰갑의 경우 이 시대(AD 300~550)에도 신뢰할만한 자료가 부족하며며 이 시대를 벗어나면 자료가 더욱 빈약하다. 골제 갑찰의 경우 기원전 시점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전체적인 형태를 복원하기에는 역부족이며 다호리 2호분 철찰 등 삼한시대의 갑옷 자료의 경우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7년 사이 철찰의 크기나 형태 변화,내중식-외중식 등 갑찰 연결방식의 변화 등에 대해서는 연구가 크게 진전되었지만 전체적인 형태나 구조 변천을 복원하는 과정은 여전히 지지부진한 상태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번에 출토된 신라 찰갑이다. 이번 발굴은 찰갑 복원 가능성을 보여준 너무나도 기쁜 소식이지만 아쉽게도 그 연대는 넓게 잡아 350~450년 사이로 위 표의 연대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AD 300~550이라는 벽은 여전히 남아 있는 셈이다. 그나마 고구려 벽화고분의 그림마저 없었다면 삼국시대 갑옷 연구는 훨씬 더 어려운 상태였을 것이다. 통일신라시대 갑주 자료의 경우 안압지에서 투구의 복발과 일부 철찰이 나왔고 화왕산성에서도 역시 철찰이 나왔으나 이것으로 갑옷 본체를 복원할 수 없음은 물론이다. 발해도 사정은 비슷해서 실물 투구 2점이 나오고 일부 철찰이 나왔으나 이것으로 갑옷 본체를 복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물론 이런 빈약한 유물을 토대로 발해 갑주 상상도를 그린 용자는 있었다) 고려시대로 추정되는 철찰이 나온 사례가 몇건이 있으나 같은 이유로 구체적인 형태 복원은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다. 거칠게 말해서 찰갑이라 뭉퉁그려도 그 세부양식은 천차만별이며 심지어 명광개조차도 갑옷의 여러 곳에 소형 미늘을 사용하기 때문에 손에 쥔 철찰,혹은 피찰만으로는 전체 갑옷 양식을 복원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과정이다. 이후 다시 갑옷 전체의 양상을 알 수 있는 갑옷 자료가 다시 나오는 시점은 고려말기 정지 장군의 경번갑 시대까지 가야 한다. 그 이후에도 시간 공백이 있어서 임진왜란대에 가야 유성룡 찰갑과 동래성 해자 출토 찰갑과 연결이 된다. 결국 우리는 6세기 중엽에서 정지 장군 경번갑이 확인되는 14세기까지 무려 800년에 달하는 무지막지한 "실물" 갑옷의 공백 기간을 가지고 있다. (간접적 자료나 부분적 자료는 있다) ![]() 이런 이유 때문에 매우 거칠게 묘사된 국조오례의서례의 조선 전기형 갑주 그림이나 여전히 몽골군과 고려군을 구분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일본의 몽고습래회사 같은 그림조차도 해당 시기 갑주 복원의 중요 자료로 간주되고 있는 상황이다. 갑옷 연구에 있어서 통일신라~조선 전기까지의 불화, 신장상 혹은 십이지신상, 무인석, 무인상 등 의 중요성을 10년 전부터 몇차례 강조한 것은 이같은 실물 갑옷의 공백 현상에 대한 고민 때문이다. 너무나도 자료가 부족하기 때문에 실물 갑옷과 차이가 있을 가능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간접적 성격의 자료에 대한 자료 수집도 불가피하다는 이야기다. 불화, 신장상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마다 "당시 갑옷과 다르다면서요"라는 댓글을 다시는 분들이 적지 않다. 옳은 말씀이고 지적이다. 불화, 신장상이 당시 실물 갑주를 얼마나 충실하게 재현하고 있는지는 매우 의문스러우며, 그같은 자료를 사용해서 갑옷을 복원하는 것은 학술적으로도 거의 무가치한 것이 될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현재로서는 참고할 자료가 매우 부족한 상황을 감안해서, 1) 불교(혹은 불교에 상관없는 무관상,무인석, 십이지신상 등 유관자료까지 포함) 미술 자료를 수집하고 2) 그 자료 내에서 시대별 양식 변화가 존재하는지, 3) 혹 존재한다면 그 같은 양식 변화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따져서 4) 이를 당시 갑옷 복원에 간접적 참고자료로 사용할 수 있는지 그 가능성을 탐색해 보는 것은 의미가 있다고 생각된다. 불교 미술품 내에서도 찰갑에 가까운 형태의 갑주 자료도 식별될 뿐만 아니라 통일신라와 고려시대 불교 미술품의 갑주 자료에도 어느 정도 시대별 변화는 간취되기 때문이다. 더구나 아직까지 통일신라~고려시대의 불화, 신장상의 갑주 관련 자료를 누락없이 완전하게 모은 자료집조차 없는 상황이다. 전체적으로 어떤 자료가 남아있는지 수집해서 분석하고 연대별 변화양상을 추적할 수 있는 기초적 접근조차 제대로 되어 있지 않는 상황에서 이런 불교 미술품 자료를 갑주 연구에서 제외한다는 결정을 내리는 것은 순서가 틀렸을 뿐만 아니라 성급하다는 이야기다. 내가 조선시대 군대 이야기를 하면서 한글 소설이나 판소리까지 뒤적거리는 것은 그것이 사료적 가치가 높다고 믿기 때문이 아니라 참고할만한 직접적 자료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불상이나 신장상을 뒤적거리는 것도 그 때문이지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다. 물론 이처럼 간접적인 성격의 사료들은 철저한 비판적 접근 과정 없이 이용할 경우 오히려 잘못된 결론으로 연결될 가능성이 높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통일신라~고려의 불교 미술품의 갑주 자료를 그것 자체로 당시 갑옷의 형태라고 간주하는 것은 오류이며, 그같은 미술 자료들을 세부적인 검토 과정 없이 그대로 갑주 복원의 직접적 참고 자료로 사용해서는 안된다. 명광개의 경우 사정이 조금 더 복잡하다. 명광개 자체는 남북조 이래 오대까지 중국 갑옷의 주류(내지 최상위급 무관의 갑옷)로 추정되고 있으나 중국에서조차 실물 갑옷이 출토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불교 미술품 뿐만 아니라 도용 등 비종교적 미술품에서도 명광개가 흔히 묘사되고 있으므로 명광개의 존재 자체는 분명하다. ![]() 중국 당나라대 미술품에 보이는 명광개. 직접 촬영. 일본의 경우에도 명광개가 묘사된 불교 미술품이 남아 있다. 개인적으로는 도쿄국립박물관에서 실물을 감상한 경험도 있다. 하지만 일본에서 명광개가 실전용 갑옷으로 실재했다고 믿는 일본 학자들은 거의 없다. 해당 시기 문헌에 명광개의 존재가 거의 나타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당시 유물을 광범위하게 보존하고 있는 정창원 등에서도 명광개의 존재가 확인되지 않기 때문이다. ![]() 일본 불교미술품에 나타난 명광개 직접 촬영 (위)
우리나라의 경우는 어떤가. 중국측 사료에 당군이 고구려 명광개를 노획한 기록(신당서 獲馬牛十萬,明光鎧萬領.高麗震駭)이 명시적으로 남아있을 뿐만 아니라 백제가 당나라에 명광개를 조공한 기록도 명시적으로 남아있다. (신당서 百濟王, 後五年,獻明光鎧) 신당서의 기록은 당시 고구려에서 이미 명광개가 갑옷의 주류가 되었을 가능성도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백제에서도 중국에 명광개를 조공한 기록을 본다면 백제에서도 명광개가 보편적으로 보급되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신라권 무기의 경우 4세기 후반이래 고구려와 밀접한 연관성을 지닌다는 것은 고고학계의 일반적 상식이다. 더구나 고구려와 백제에 이처럼 명광개가 급격하게 보급된 상황에서 신라에서만 그 같은 현상이 발생하지 않았다고 단정하기도 어려운 상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구려-백제 고분의 박장 풍습과 도굴 때문에 명광개 실물 유물을 확인하기 쉽지 않고 명광개가 보급된 7세기대 벽화 고분도 현재로선 확인된 바 없다. 신라의 경우도 6세기 이후엔 갑옷을 부장하는 풍습 자체가 사라졌다. 대신 간접적 미술품 자료에서는 명광개가 묘사된 경우가 매우 많다. 이런 상황이라면 삼국시대의 명광개는 위상이나 그 구체적 형태를 논하는 것은 현재로서는 매우 어렵다. 문헌기록, 실물 유물, 간접적 불교미술 자료가 매끄럽게 연결이 되지 않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 통일신라시대 십이지신상의 명광개 (직접촬영) 통일신라시대 유적인 안압지와 화왕산성에서 철찰이 나온 사례가 있지만 이것을 어떻게 해석할지도 사실 쉬운 문제는 아니다. 명광개의 경우에도 흉갑을 제외한 부위에선 철찰을 사용하므로 철찰만 출토된 상황에선 이것이 오로지 찰갑의 부속이라고 단정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특히 안압지의 투구는 그 이전 6세기 중엽 이전의 종장판주와는 기술적 계통이 완전히 다른 투구여서 6-8세기 사이 신라권에서 투구의 양식 변화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이같은 양식 변화는 어찌보면 이 시기 갑옷에도 모종의 양식 변화 가능성을 시사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현재까지 출토된 통일신라시대 갑옷 유물들은 명광개의 존재를 긍정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존재 가능성을 부정하는 직접적 증거자료로 보기도 어렵다. 이런 점들을 감안했을 때 실물 갑주 자료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신라-통일신라시대 명광개의 존재 가능성을 완전히 부정하기도 쉽지 않다. 이렇게 신라에서 명광개가 존재했을 가능성을 긍정적으로 보았을 때 그 형태를 추정하기 위한 단서는 현재로서는 불교 미술품밖에 없다. 물론 좀 더 이상적인 상황은 실물 갑주가 출토되는 것이지만 그것이 언제가 될지는 아무도 예측하기 어렵다. 의문은 남아있다. 신라의 경우 통일신라 이후 명광개의 존재 가능성을 긍정하는 차원을 넘어서서 주류 갑옷의 위치에 올랐을지 여부까지 따져볼 수 있을까. 현재로서는 대답할 수 없는 영역인 것 같다. 직접적인 출토 사례가 극히 빈약해 일반적인 경향을 언급하기에는 역부족일 뿐만 아니라 그에 대해 직접적으로 언급한 문헌 사료도 없기 때문이다. 그 점에서 아래 댓글에서 어느 분이 "명광개가 통일신라시대의 주류 갑옷인 것으로 묘사한 사극의 고증이 틀렸다"고 말씀하신 것은 어느 정도의 진실을 담고 있다. 물론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명광개가 통일신라대의 주류 갑옷인 것으로 묘사한 사극의 고증이 맞는지 틀리는지는 아직 불확실하다"가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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