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성시간 : 2011/11/30 0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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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테고리 : 역사잡설

요서 내륙 지역에 위치한 라마동 유적의 위치 (A표시)
■ 요서 라마동 거주민이 부여족이라는 폭탄 발언
지난 2010년 4월30일 길림대의 주홍 교수가 경남 김해에서 열린 제16회 가야사 세미나에서 이상한 발언을 했다. "라마동 삼연 문화 주민의 족속문제에 대한 생물고고학적인 고찰"이라는 논문을 통해 라마동 삼연 문화 주민이 부여족이라는 이야기를 한 것이다.
삼연은 전연(前燕 337~370)과 후연 (後燕 384~409), 북연 (北燕 409~438)을 지칭한다. 삼연은 잘 알려져 있다시피 선비족이 주체가 되어서 생긴 국가다. 사실 2000년대 중반부터 중국 고고학자들이 간헐적으로 라마동 삼연 문화가 고고학적으로 부여와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계속 언급해서 궁금증을 불러 일으켰는데, 중국 형질인류학의 대가인 주홍 교수가 직접 우리나라에 와서 아예 라마동 삼연 문화 주민이 부여족이라고 폭탄성 발언을 한 것이다.
물론 주홍은 삼연이 부여족이라거나, 선비족=부여족이라는 이야기를 한 것은 아니다. 중국 학계에서는 선비족계 전연이 여러차례 부여를 공격해 대량으로 포로를 잡아왔고, 이들 부여 포로들이 선비족 정권 내에서 일정한 위치를 차지하면서 고분을 조성한 지역이 라마동이란 이야기를 한 것이다. 고구려와 백제가 멸망한 후 그 지배층 중 일부가 당나라에서 고위 장수를 지냈듯이 선비족에게 포로로 잡혀간 부여족들도 모두 노예처럼 거주한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 밀집 고분을 조성할 정도로 삼연(특히 전연) 지배층 외곽에 자리잡은 집단도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사실 삼연에 부여계 관료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전연 산기시랑 여울 등의 사례가 이미 문헌에서도 확인된 사례가 있다.
그렇다면 왜 내가 주홍 교수의 발언을 "폭탄성 발언"이라고 표현했을까. 사실 라마동 유적 자체가 선비족이 주체가 된 유적이 아니라 종족적으로 부여계 집단의 유적이라는 것 그 자체도 적지 않은 의미가 있다. 라마동 유적이 동아시아 한/중/일 고대 갑옷, 마구 역사와 계보에서 차지하는 압도적이고 선도적인 위상을 이해한다면 라마동 유적이 부여계 유적이라는 것 자체가 사실 충격적인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주홍 교수의 발언을 "폭탄성 발언"이라고 표현한 것은 그 때문이 아니다. 특정한 지역에서 출토된 대량의 인골을 두고 중국 학계, 특히 형질인류학 전공자들이 부여족이란 구체적 표현을 사용한 것이 이번이 처음이기 때문에 "폭탄성 발언"이란 이야기를 한 것이다.
사실 형질인류학적으로 부여족 혹은 고구려족, 혹은 부여인, 고구려인의 정체는 여전히 모호한 영역이었다. 부여-고구려계 고분에서 형질인류학적인 연구기법을 적용할 정도로 양호한 상태의 인골이 대량 출토된 사례가 없었기 때문이다.
■ 그동안 모호했던 부여-고구려계 집단의 형질인류학적 특징
다만 현대 만주족이 현대 한국인과 형질인류학적으로 매우 유사한 특성을 보여준다는 점을 토대로 볼 때 그 중간지역에서 거주하던 집단인 부여-고구려계 집단이 현대 한국인과 형질인류학적으로 매우 유사한 특성을 지닌 집단일 가능성이 높다("만주족과 현대 한국인의 유전적 관계 2008.1.29" http://lyuen.egloos.com/4117885")는 점은 이미 예전부터 이야기해 왔다.
하지만 이같은 나의 정황론을 뒷받침할만한 형질인류학적 증거는 지금까지 없었다. 특히 고구려나 부여하기 존재하기 이전 단계인 기원전 10~기원전 4세기 중국 길림성 서단산 유적의 인골이나 기원전 16~11세기의 요령성 본계 유적의 인골은 현대 한국인과 비교하기 애매한 특성이 많아 논란이 되었다. 북한 사회과학원 "조선사람의 기원" 150쪽의 표를 보면 서단산 유적의 인골은 머리뼈 높이가 평균 132.0mm에 불과했다. 이는 북한 학계에서 산출해낸 이른바 "조선 옛 유형 사람"의 머리뼈 높이 평균 140.3mm보다 두드러지게 낮아서, 과연 서단산 인골을 "조선 옛 유형 사람의 한 지방유형"으로 간주할 수 있을 것인지 망설이게 만들었다.

북한 학계가 분석한 서단산 인골의 정체. 도표 원출처 "조선 사람의 기원, 1989".
북한 학계는 서단산 인골이 "조선 옛 유형 사람의 한 지방유형"이라는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처절하게 사투를 벌였으나 위 표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서단산 인골이 퉁구스족과 현대 한국인의 중간 정도의 위치에 있음을 숨길 수는 없다.
그렇다고 서단산 유적 인골을 퉁구스계 집단으로 보기에는 두장경이 175.mm, 두폭경이 138.1mm로 너무 작았다. 다시 말해 서단산 유적은 한국인과 관련시키기에도, 반대로 퉁구스계(역사상의 숙신-말갈)와 관련시키기에도 다소 애매한 특이한 유형의 인골이었다. 이 때문에 북한 학계에서는 "조선사람의 기원" 155쪽에서 매우 복잡한 계산을 거쳐 서단산 유적 인골과 현대 한국인 사이의 집단적 쌍거리가 5.1인데 퉁구스와는 6.2라는 수치를 제시하면서 상대적으로 서단산 유적이 현대 한국인에 끌리는 경향이 존재함을 강조해 왔다.
서단산 유적 외에도 요령성 본계 유적에서 나온 인골이라도 현대 한국인 내지 한국인과 유사한 만주족과 비슷한 유형의 인골이 나왔으면 논란이 종식되었을 텐데 결과는 그것이 아니었다. 요령성 본계 유적의 인골도 북한 학계가 주장하는 이른바 "조선 옛 유형'이나 현대 한국인, 현대 만주족과 관련이 있다기 보다는 일본 고대 죠몽, 일본 고대 야요이 인골 중 일부, 일본 현대 아이누 등 세 집단을 삼각점에 두고 야요이와 조몽의 중간 정도에 위치한 정체불명의 형태를 가지고 있었다. (본계 유적 인골의 상대적 위치에 대해서는 주홍, 东北亚地区古今居民种族类型的比较研究, 길림대 사회과학학보 1998-5기 4쪽 참조)
이들 유적은 기본적으로 부여-고구려 건국보다 훨씬 이전 단계의 것이고, 부여나 고구려의 유적이 분명한 곳에서는 막상 형질인류학적인 연구를 안정적으로 진행할 정도로 많은 수량의 인골이 출토된 사례가 없었다. 이 때문에 은나라 지배집단, 동호족, 선비족, 탁발선비족, 거란족 등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수치까지 제시하면서 형질인류학적 특징을 나열하던 중국 고고학계나 형질인류학계에서도 부여나 고구려의 형질인류학적 정체에 대해서는 뭐라고 구체적인 언급을 자제하는 경향이 많았다. 그러던 중국 학계에서 도대체 어떤 결과가 나왔길래 느닷없이 북표 라마동 삼연문화를 조성한 주민 집단이 부여족이라는 발언을 한 것일까. 어떤 형질을 가진 집단이 부여족이란 이야기도 하지 않던 중국 학계에서 왜 부여 본거지도 아닌 엉뚱한 요서 북표 라마동 유적을 놓고 부여족을 거론하는 모험을 한 것일까. 부여의 영토가 아님이 분명한 요서 내륙지역에서 출토된 인골을 놓고 부여계라고 말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2010년에 주홍 교수가 국내에서 발표했던 논문 전문은 열람할 수 없었지만 발표 요지에 적힌 "고화북유형과 고동북유형의 혼혈" 운운하는 설명은 부여족이라고 결론을 내린 근거로는 다소 약하다고 느꼈다. 사실 길림대 형질인류학 연구자들이 말하는 고화북유형과 고동북유형 두 집단의 혼혈로 형성되었음직한 역사상의 집단은 그 외에도 무수히 많기 때문이다.
■ 라마동 유적을 놓고 중국학계가 부여족이란 이야기를 한 이유
사실 중국 학계에서 라마동 유적을 순수한 선비계 유적이 아니라 부여계 유적이라고 간주할 수 있었던 출발점은 고고학적인 관점에서 유물 양상이 전형적인 선비족 무덤의 그것과는 달랐다는 점 때문이다. 동시에 라마동의 유물이 송화강 유역의 부여권 유적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기 때문에 고고학에서 먼저 부여계라고 언급한 것이다. 하지만 일반적인 고고학자도 아니고 형질인류학 전공자들까지 굳이 "부여족"이란 표현을 직접적으로 쓴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이런 의문을 품고 있던 차에 중국 길림대에서 2010년에 공개한 박사 논문(라마동 삼연문화 거주민의 인골연구 2009)을 보고 모든 궁금증이 풀렸다. 왜 부여 본거지도 아닌 요서 지역 내 부여 포로 집단의 무덤을 놓고 중국 형질인류학계가 굳이 부여계로 못박을 수 밖에 없었던 이유가 말이다.
아래 표를 보자.

위 표는 동북아시아 제 집단과 라마동 유적 인골의 주요 측정치와 지표 총 19개를 Morant 기법을 이용해 비교한 것이다. 표에서 화북조는 1920~30년대 측정 자료에 기반한 중국 북방 한족, 조선조는 일제 강점기 때 일본 형질인류학계가 측정한 식민치하의 한국인을 지칭한다. 기타 몽고조는 몽골족, 애사기마조는 에스키모족, 통고사조는 퉁구스족, 나내조는 남부 퉁구스계 나나이족을 의미한다. 보는 바와 같이 비교 집단 중에 가장 가까운 것은 한국인이다. 그 다음 가까운 것이 남부 퉁구스계 나나이족이고, 그 다음이 북방 한족, 몽골족이고, 퉁구스족은 가장 멀다.
1920~30년대 화북조 다시 말해 북방 한족의 측정치는 현대 이후 중국 학계의 측정치에 비해 상대적으로 두장경이 짧은 경우가 많다. 다시 말해 비교 데이터를 다른 것으로 사용했다면 부여족과 북방 한족의 거리는 더 멀어질 가능성도 있다. 남부 퉁구스계 만주족이 형질인류학적으로 한국인과 매우 유사한 특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을 고려해 보면 위 표에서 한국인 다음으로 남부 퉁구스계 나나이족이 라마동 부여족과 가까운 거리에 있다는 사실은 별로 놀랍지 않다.

위 표는 같은 형질인류학적 측정치와 지표를 유클리드 거리로 계산한 것이다. 역시 라마동 부여족과 현대 한국인이 가장 가까운 집단으로 나온다.

위의 계산결과 수지형 표로 그리면 당연하게도 라마동 부여족과 현대 한국인이 한 그룹으로 묶인다. 에스키모와 나나이족이 한 그룹으로 묶이고 한 단계를 건너 뛰어 북방 한족과 연결된다. 퉁구스족과 몽골족이 그와 구별되는 그룹으로 묶인다.
다시 말해 중국 길림대 형질인류학 연구팀은 자신들의 분석 기법상 요서 북표 라마동에서 나온 인골이 현대 한국인과 가장 가까운 것으로 나왔기 때문에 이 유적의 종족적 주체를 부여족이라고 간주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결국 이 논문은 부여족(그리고 이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집단인 고구려족 내지 고구려인)이 현대 한국인과 형질인류학적으로 매우 가깝다는 점을 사실상 뒷받침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동안 막연하게 부여-고구려를 우리 역사로 생각하는 역사 인식론 내지 역사 계승의식 차원을 넘어서서 형질인류학적으로도 부여-고구려와 현대 한국인의 연관관계를 한 차원 더 진전된 상태(최종 결론은 아니다)에서 논할 수 있는 자료를 확보했다는 것에 이 논문의 의미가 있는 것이다.
■ 예상되는 질문과 지적에 대한 Q&A
➀ 부여-고구려계와 현대 한국인이 동일 계통의 집단이었음을 증명했다고 볼 수 있나?
증명이라는 표현을 사용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측정한 인골 개체수는 426건에 이르고, 이중 성별이 명백한 404개의 예를 연구에 이용했다. 그 중에서도 두장폭 지수등 형질인류학적 주요 측정치와 지표를 비교하는데 사용한 남성 성인 인골의 수는 대략 40~73개체에 이른다. 이 정도 많은 고인골을 이용한 연구는 흔하지 않고, 앞으로도 기대하기 힘들 것이다. 워낙 인골 보존 상태가 좋았다. 다만 머리높이가 136mm라는 점은 한국 학계나 북한 학계에서 공개한 한국인 인골 머리 높이 평균치(140mm 내외)와 비교해 다소 낮은 것이다. 물론 서단산보다 높지만 현대 한국인과 비교해서는 눈에 띄는 점이다. 이것이 순수 부여족의 인골이 아니라 당시(3~5세기) 선비족 내에 포로로 끌려 왔던 부여계 집단과 현지 주민과의 어느 정도 혼혈이 된 집단이라면 상대적으로 낮은 머리 높이는 해석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중국 학자들이 개별 데이터들의 측정치는 공개하지 않았지만 고동북유형과 고화북유형 운운하는 것을 봐선 현저히 다른 특성을 지닌 인골이 혼입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균치로 봐서 현대 한국인과 가장 가까운 집단이란 결과가 나온 것을 볼 때 부여-고구려계 집단과 현대 한국인 사이에 연결고리가 존재했다고 가정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부여-고구려계와 현대 한국인이 동일 계통의 집단이라고 단정적으로 표현하기 힘들지 몰라도 모종의 강한 연결 관계가 있음을 부정하기는 힘들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모종의 강한 연결관계라는 것은 결국 문헌 사학계에서 말하는 "한국인의 3원적 구성설, 즉 고대 예-맥-한 3개 종족의 결합체가 현대 한국인의 뿌리"라는 주장과 "고대 삼한은 북방의 예맥족(부여-고구려의 주류 종족)이 한반도 남부지역에서 지역화한 종족으로 본질적으로 예맥족과 유사한 특성을 지닌 집단"이라는 주장을 의미한다.
➁ 동일 계통의 집단이라고 단정적으로 언급하지 않는 이유는?
오늘날 유전자 인류학이 발달한 상태에서 고전적인 형질인류학적 측정치만으로 결론을 내릴 수는 없다. 라마동 유적의 mtDNA를 분석해 제 집단과의 상호거리를 분석한 연구결과는 이미 일부 공개가 되고 있지만 각 하플로그룹을 특정할 수 있는 구체적인 데이터는 아직 부분적으로만 공개되고 있어 본격적으로 논의할 수 있는 단계가 아니다. 그리고 애당초 현대 만주족과 현대 한국인은 형질인류학적 밀접한 관련이 있지만 두 집단을 두고 동일 종족, 내지 동일 민족이라고 표현을 사용하는 연구자나 학자는 전혀 없다. 양 집단의 언어 차이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언어계통론 내지 비교언어학적 관점에서 봤을 때 고구려어는 현대 한국어와 모종의 연결고리가 존재하지만 고구려어와 가장 가까운 언어집단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학자들의 주장이 엇갈린다. 퉁구스-한국-일본을 한 그룹으로 묶을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그 안에 고구려어를 포함시키는 학자도 있고, 한국-일본어를 한 그룹으로 묶으면서 고구려어는 상대적으로 일본어에 더 가깝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반대로 고구려어와 몽골어나 퉁구스어와의 관련성을 주장하는 학자도 있었다. 물론 우리나라 학계 일부와 북한 학계에서는 고구려어와 가장 가까운 언어는 한국어라고 주장하면서 고구려와 신라어의 간격이 그리 크지 않다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다. 다시 말해 언어적인 관점에서 고구려어의 위상과 정체에 대한 연구는 현재 진행형 내지 좀처럼 돌파구를 만들어내지 못하는 상태에 있다. 다만 부여-고구려계 집단이 현대 한국인과 형질인류학적으로 연결고리가 존재한다는 점을 확인했고, 아마도 유전자 인류학으로도 비슷한 결과가 나올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에 앞으로 고구려인내지 고구려족과 고대 한국인(삼한)이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는 집단이라는 점 정도는 증명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정확한 용어는 아니겠지만 앞으로 "고구려인과 백제인, 신라인은 형제민족"이라는 표현을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연구가 진척될 가능성은 있다.
➂ 형질인류학은 무용하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고고학 전공인 S대의 L교수도 과거에 이런 연구에 대해 혹평하지 않았나?
형질인류학에서 사용하는 각종 측정치와 지표들이 유전적인 요소뿐만 아니라 생활환경에 의해서도 변할 가능성이 있다는 점은 부정하기 힘들다. 하지만 형질인류학이 완전 무용하다고 말하는 것도 동의하기 힘들다. 지난 2008년 러시아 과학아카데미 시베리아 분과에서 나온 학회지에도 한반도 고인골을 형질인류학적으로 분석한 논문이 게재됐다. 우리나라는 형질인류학을 상대적으로 박하게 평가했던 영미권 학계의 영향을 받아 유전자 인류학은 인정하면서 형질인류학은 평가절하하는 경향이 강한데 꼭 그렇게 볼 수는 없다고 본다. 지난 2008년 이후 동래성 해자 발굴 때도 칼에 부서진 인골들의 국적을 확인할 때 결국 형질인류학적 측정치와 지표를 동원해 일본군이 아니라 조선인 인골이라고 결론내리지 않았나. 무용하다는 소리를 하면서도 막상 고인골을 손에 들었을 때 형질인류학적 연구방법론을 무시하기는 힘들다. 그리고 중국 학계에서 동일 지역에서 비슷한 생활환경을 가지고 있는 만주족과 한족 대학생을 형질인류학적으로 비교 연구한 결과를 보면 종족별로 형질인류학적인 차이가 분명히 식별된다. 다시 말해 생활환경이 형질인류학적 측정치를 변화시킨다할지라도 유전적 영향을 완전 배제할수는 없다. 서구권보다 형질인류학적 연구자료가 많이 축적된 러시아와 중국의 각종 통계자료를 보면 동북아 지역의 제 종족집단의 상호관계를 비교할 때 형질인류학적 연구결과는 유전자 인류학의 연구결과와 상반된다기보다는 상호 보완적이다. 요서지역의 인골이 형질인류학적으로 고동북유형이 고화북유형으로 교체되거나 고몽고고원유형으로 교체될 때 유전자 인류학적 관점에서도 하플로그룹의 비율과 구성에 급격한 변동을 일으키는 현상이 확인된다. 다시 말해 형질인류학적 연구가 다른 연구와 연계해서 보조적인 참고 자료로 이용되는 한 무용하다고 비판할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➃ 우리 학계의 형질인류학적 연구결과, 특히 국편위의 한국사 시리즈를 비롯해 여러 중요한 개설서와 논문집에 실린 P교수의 연구결과를 보면 신석기, 청동기, 철기, 고려, 조선시대 각 인골의 형질인류학적 측정치와 주요 지표들이 급격하게 요동치는 현상이 있다. 막상 한국인 내지 그 조상임이 분명한 인골에도 이처럼 지표가 요동치는데 이런걸 어떻게 해석해야하나?
측정에 사용한 인골의 숫자가 너무 적다는 소리를 할 수 밖에 없다. 이 점은 이미 관련 연구자도 인정한 사례가 있다. 현대 한국인이 단두라고 해서 한국인 100명을 측정해서 단두가 100%가 나오는 것이 아니다. 고인골은 해당 유적에서 1~2개 샘플 정도 수집한 경우가 많아 일반화하기가 상당히 부담스럽다. 물론 늑도 인골 같은 경우 단순히 샘플 타령은 하기에도 너무 벗어난 측정치를 보여준다. 이런 인골은 종족 이동, 민족 이동 현상이 흔적을 남긴 것이라고 볼 여지가 있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상대적으로 머리 높이가 높다는 점은 어느 정도 일관성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➄ 왜 하필이면 부여족 포로인가. 부여 영토가 요서 라마동까지 미쳤다고 해석할 수도 있는데
그런 질문이 나올 줄 알았다. 하지만 그렇게 보기엔 당시 문헌이 묘사하는 시대 상황과 전혀 맞지 않는다. 라마동 유적 이외에는 당시 요서 일대에 전형적인 선비족풍의 유적이 많이 존재한다. 라마동 유적 외에 당시 요서지역 유적에서 나오는 인골도 고몽고고원유형-고시베리아유형-북아몽고인종 계통이어서 라마동의 인골과 전혀 달라 선비족 계통의 유적임이 분명하다. 다시 말해 라마동 유적이 기본적으로 선비족의 정치적 영향권 내에 있었던 부여족의 유적이라는 점을 부인하기는 힘들다.
➅ 왜 하필 부여족인가. 요서에서 현대 한국인과 가장 가까운 인골이 나왔다면 백제 요서진출설의 증거로도 활용할수 있지 않나.
이런 질문도 나올줄 알았다. 인골 자체만 보자면 그렇게 해석할 여지도 있다. 하지만 출토된 유물의 양상이 한성 백제 내지 그 이전단계의 한강 유역 일대의 유물과 비교할 여지는 없다. 선비족 유물과 부분적으로 관련이 있으면서도 송화강 유역의 유적들과도 강한 관련성이 있는 유물들이어서 부여 외에 다른 집단을 생각하기 힘들다.
➆ 이런 연구기법으로 중국의 대문구문화 등 동이족이 건설했다는 유적에서 나온 인골과 현대 집단을 비교할 수 있지 않나. 다시 말해 중국의 선진 동이족이 한국인과 정말 관련이 있는지 분석할 수 있지 않나.
연구가 되지 않았다고 생각하나? 이미 중국학계에서도 연구한 적이 있고 북한 학계에서도 연구한 적이 있다. 우선 북한 형질인류학계는 이미 앙소문화의 반파유형 고인골이나 대문구-용산문화의 대문구, 서하후 고인골의 특징을 연구해 조선 옛 유형사람이나 현대 한국인과 관련이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다시 말해 북한 형질인류학계는 선진 동이족과 현대 한국인이 관련있다는 주장에 대해 인정하지 않는다. 구체적인 내용이 궁금하다면 1989년간 <조선사람의 기원>, 2009년간 <조선사람의 체질>, <조선사람의 기원과 형성>을 참조하면 된다. 우리 학계에서는 한국 신석기 시대 인골과 중국 신석기시대 용산 문화 인골이 상당 부분 일치한다는 언급을 한 논문(한림과학원총서41 한국 민족의 기원과 형성 수록)이 있지만 세부적인 비교를 하지 않아 큰 의미는 없다. 중국 학계의 연구결과는 조금 복잡하다. 대문구 문화인골에 대해 동아몽고인종과 남아몽고인종이 혼혈되었다고 생각하거나, 아니면 폴리네시안적인 특성이 있다고 생각하는 학자들도 있다. 이런 견해를 부인하면서 모두 고중원유형의 아형으로 앙소,대문구, 용산 문화 유적에서 나온 인골이 형질인류학적으로 차이가 없다고 생각하는 학자들도 있다. 다시 말해 중국 학계의 연구결과는 아직까지 현재 진행형이다. 이렇게 논쟁이 진행되는 이유는 대문구문화권 내에서 출토되는 인골이 편두 등 인공적 변형이 된 경우가 많아서 정상적인 형질인류학적 접근법으로 분석하기에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 인골을 유전자인류학적인 방법으로 분석해야 최종적인 결론이 나올 것이다.
덧글
상식적으로 부여계 집단이 고구려보다 북쪽에 거주한 집단이어서 부여계 집단이 이 정도로 현대 한국인과의 거리가 가깝게 나온다면 굳이 고구려계 인골을 통해 재확인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관건은 고인골에 대한 형질인류학적인 연구에 유전자 인류학적인 접근을 연동시키는 과제가 남았지요. 이건 우리나라에서도 몰래몰래 연구를 진행하고 있고, 중국은 거의 물량공세 수준으로 연구를 하고 있어서 어떻게든 결론은 나올 겁니다.
만주족은 비슷할거라 생각했는데 니브히는 어떤 민족인지 모르겠네요. 이름도 처음 듣는데...
그나저나 예맥은 생각보다 더 강성한 부족이었을것도 같군요.
니브히(길랴크)는 연해주 북쪽, 흑룡강 하류와 사할린 등지에서 살던 소수민족인데 언어적으로나, 체질인류학적으로 주변 집단과 뚜렷하게 구별되는 집단이어서 예전부터 논란이 많습니다.
이상하게 형질인류학적으로 우리나라와 접근하는 경향이 있고, 언어에서도 극히 이례적으로 문법 형태소에서 한국어와 매우 유사한 점이 많아서 한동안 국어학계의 변방에서 기층언어니 저층언어니 하고 논란이 많았던 집단이죠.
한 때 우리나라 고고학계 일부에서도 청동기시대 이후 한국인의 직접 조상이 한반도로 이주했다고 주장하면서, 길랴크족 등은 신석기시대까지 한반도에 살던 원주민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이런 견해들을 (국어학계나 고고학계에서도) 반대하는 견해도 많았습니다.
이미 너무 소수집단으로 전락한 탓인지... 최근의 유전자인류학쪽의 접근으로는 연구마다 편차가 너무 심해서 아직 한국인과 관련된 실체가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고 있습니다.
니브히가 우리와 유사한 집단이라면 (우리와 관계가 있다는건 거의 확실해 보이는군요. 아무래도 꽤 가까운 시간에까지[이런걸 추정 할 수 있다면...] 동질성이 있었을지도요. 신석기나 청동기는 너무 먼것 같아서;;) 우리가 현재 동남아라 부르는 지역에서도 그런 집단들이 있진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포르투갈인의 후예로 지역 대다수의 원주민과 사뭇 다른 특성을 보이는 사람들이 있다는 기사가 생각나기도 하고요.
다만 중국 형질인류학계와 유전자인류학계는 이미 문헌상의 탁발선비와 모용선비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유사하고, 어떤 점은 다른가를 수치 차원에서 언급하고 이를 그리고 바탕으로 큰 범주에선 사실상 유사한 특성을 지닌 집단이란 결론을 내릴 정도로 연구가 진전되고 있습니다. 막연하게 문헌사학계에서 언급하는 수준을 넘어서고 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독 저 유적이 문제가 됐던 것이 분명히 선비족 정치체의 범위 안에 포위된 유적임에도 불구하고 1) 동시기 모용선비족 무덤의 매장 유물과 전혀 다른 유물 구성을 가지고 있고, 2) 동시기 요서일대에서 유별나다고 할 정도로 형질인류학적으로 전혀 다른 특성을 가진 인골이 묻혀 있고 3) 심지어 안정동위원소 분석에 의한 음식물 섭취 패턴 연구결과 곡물 기반 식생활을 한 것으로 확인되어 육류 섭취가 높은 선비족계 인골과 전혀 다른 특성을 보여줬습니다. 그래서 논란이 됐고, 최종적으로 모용선비족에게 포로가 된 부여계 집단의 무덤이라는 결론이 나온 것이죠.
중국 형질인류학계의 의견에 중국 문헌사학자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합니다. 특히 기를 쓰고 예맥족을 몽골계라고 주장했던 손진기 같은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합니다.
다시 말해 막연하게 부여-고구려를 우리 역사로 생각하는 역사 인식론 내지 역사 계승의식 차원을 넘어서서 형질인류학적으로도 부여-고구려와 현대 한국인의 연관관계를 한 차원 더 진전된 상태에서 거론할 수 있는 자료를 확보했다는 것이 의미가 있습니다.
http://www.theapricity.com/snpa/bilder/basion-bregma.jpg
개인적으로 동북공정에 아주~~~ 큰 도움이 될 것 같아 기쁩니다 낄낄
2.
위치를 보아하니 의라 이후 망한 동부여의 유민이 서진의 도움을 받아 나라를
다시 세웠다는 얘기가 다시금 스물스물 제 미약한 머리에서 되살아 났습니다.
이게 먹힐 가능성이 있는 지 여쭤보고 싶습니다.
3.
동이족-대문구문화 연관 떡밥은 아는 바가 거의 없으나 상당히 근거가
빈약하다 느꼈는데 맞다고 봐도 될런지요?
한국의 동붕공정에 반대하는 동북공정비스무리(간도운운)을 비꼬고 말한 것이라면 난독해서 죄송합니다.
비꼰 거였음돠 ㅠㅠ
괜찮아유 아프고 좋쥬 ㅠㅠ
3. 적어도 형질인류학적으로는 선진 동이족과 현대 한국인과의 연관관계를 적극적으로 주장할 증거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또한 이 주제도 언어적인 부분도 접근을 해야하는데 이것도 워낙 큰 주제라 어렵군요. 다만 최소한 현재까지의 연구 수준을 고려한다면 선진 동이족=한국인 식의 결론은 매우 성급할 뿐만 아니라 입증할만 근거가 부족한 주장이라고 표현 할 수 있겠죠.
그런데 트랙백으로 붙은 글은 읽으니 좀 뜬금없는 느낌이 드는군요.( ' ^')
정말 어이가 없네요.
특히 주홍이 말하는 고동북유형이 高颅에 阔面 을 가진 고인골인데 이게 개별적으로 가면 너무 양상이 다양해서 어지간히 정밀하게 아형을 설정하지 않는한 기본 유형으로서 의미가 의심스러울 때가 많죠. 다만 개별 인골을 두고 단두 고두고안에 협면이라는 식으로 장황하게 설명하지 않고 무슨 무슨 유형이라고 언급할 수 있는 정도의 효과 밖에 없죠.
결국 말씀처럼의 북한의 비계측징표 혹은 관찰지표, 중국의 비측량성 상적연구처럼 cranial non-metric trait에 기반한 데이터를 축적하고 이것을 기존의 계측징표와 결합해 유형을 설정하는 연구가 필요할 것입니다.
참고로 이 글에서 쓰지는 않았지만 북한 형질인류학계에서 한/중/일/몽/시를 구별할 수 있는 관찰징표 중 하나라고 주장했던 눈확웃구멍(supraorbital foramen)의 경우 라마동 부여족 인골 300개체 중 205개체에서 확인되어 비율이 68.3%에 달합니다. 북한 학계의 논리대로라면 동북아에서 눈확웃구멍의 비율이 이렇게 높은 것은 한국인 밖에 없으므로 이 수치도 이 인골의 귀속문제를 결정하는데 유효가 자료가 되겠죠.
하지만 중국쪽의 자료를 보면 동아시아 제 집단 중에 60%를 넘기는 집단이 수두룩합니다. 다시 말해 cranial non-metric trait쪽 지표 중에 일부는 나라나 학자마다 측정방법에 차이가 있는 경우도 있고, 일부 항목의 경우 주관성이 개입할 여지가 남아 있어서 당장 비교자료로 쓰기에 부담스러운 경우도 있더군요. 그래도 고인골이란 것이 워낙 개체수가 적기 때문에 하나라도 더 비교할만한 지표를 뽑아내야 연구를 진전시킬 수 있을 겁니다. 그런 점에서 chojae님 말씀에 원칙적으로 공감합니다.
예상 질문 및 Q/A도 잘 읽었습니다. 개인적 감상으로는,
삼국시대에서 고구려는 이방민족이다. 신라 민족설 운운하는(고구려는 우리 역사가 아니고, 그쪽은 우리 선조도 아니라는 주장)에는 상당한 반론이 되겠네요.
물론 언어적인 문제도 있습니다만...
당시에 녹음기를 들고가서 김춘추와 고구려측이 같은 언어를 썼는지를 녹음이라도 해야 밝혀질듯 하여 아쉽습니다.
요서와 발해만 일대의 선진 동이족들은 아무래도 지역 자체가 요동지역과 황하지역의 중간 접경지역이다 보니 양측의 문화/인종이 혼재되어 복잡한 게 아닐련지요. 아무래도 각 지역의 중심지보다야 활잘하게 외부와 교류가 일어나는 지역이니.
좀 다른 질문입니다만, 요서가 아닌 요동 일대의 고대인류의 경우 현재 한국인과의 선조라는 관점에 대해서는 각국학계의 연구결과나 이론, 관점은 어떻습니까?
요동의 경우 정가와자, 서단산, 본계 등의 인골이 대표적인데 위에서도 일부 설명했듯이 조금 애매한 구석이 있습니다. 북한에서는 정가와자도 "조선 옛 유형"에 넣고 위 본문에도 설명했듯이 서단산의 경우도 "조선 사람에 끌리는 경향"이라고 표현하고 있지만 솔직히 말해서 아직까지는 애매한 구석이 많다는 것이 사실에 가까울 것 같습니다.
연구가 가능할 정도로 상태가 좋은 것을 기준으로 한다면 요서에 비해 요하 이동 지역의 고인골은 사례가 매우 적습니다. 그러니 이번 북표 라마동 인골의 분석 사례가 의미가 큰 것이구요.
이중에서 무엇을 최우선으로 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자신이 없는데...다만 어느 한가지를 빼는 것도 무리일 것 같습니다. 언어라는 것이 교체가 가능하다는 단점이 있지만, 한 집단의 문화와 역사적 계승성을 총체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언어이기 때문에, 언어를 배제한 상태에서의 접근은 무리일 것 같습니다.
다만 각 집단별로 어떤 요인에 의해 언어가 교체되었는지 여부를 면밀하게 검토할 필요는 있겠죠. 형질인류학적-유전자인류학적으로 유사한 집단이 언어가 다르다면 반드시 그에 수반되는 모종의 역사적 사건(정복, 피정복 등)이 전제가 될 것이고, 그것을 고고학적으로나 문헌사학적으로 밝혀낼 수 있다면 좀 더 입체적인 접근이 가능하겠죠. 하지만 현재로서는 각 분야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연구와 논쟁이 진행되고 있기 때문에 전체상을 아우르는 것은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최근 의대에서 유전자 인류학쪽 연구를 해서 상당히 센세이셔널한 논문이 국내에서도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상염색체쪽은 지역별 차이에 대해 상당히 폭발성을 지닌 주장을 담은 논문도 나왔고, mt DNA 하플로타입을 기초로 주변 집단과 비교한 연구 중에 하나도 결론이 상당히 센세이셔널합니다.
다만 이런 연구들이 기존 문헌사학이나 고고학적 연구결과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연구들이 많아서 사학계에서 이런 연구들을 본격적으로 인지할 때쯤이면 한바탕 소동이 벌어질 것 같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어디에 우선권을 두어야 하냐고 말하면 분명히 형질인류학, 유전자인류학이 우선되어야 하고 고고학, 문헌사학 이 그 다음이고 언어학, 신화학, 민속학 등은 부차적인 증거로 활용될 수는 있지만 위에서 말한 상위하는 증거들이 전혀 부재한 채 언어, 신화, 민속 등의 자료만을 근거로 어느 집단의 혈통 문제에 대한 근거로 사용하기는 좀 어렵다고 봅니다.
1. 부여족과 현대 한국인이 형질 인류학적으로 유사할 것이다
라는 추론 자체는 충분히 합리적이지만
2. 현대 한국인과 형질 인류학적으로 유사하니 부여족일 것이다
라는 결론은 뭐랄까... 좀 비약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1.조차 확실히 입증된 게 아닌데 말이죠.
무덤 구조나 마구, 토기 양식 등 여러 면에서 전형적인 모용 선비 유적과 차이가 있다는 것이 그 이유입니다. 遼寧省文物考古研究所의 田立坤도 라마동 유적에 대해서 부여계일 가능성을 언급한 것 등이 전형적인 사례입니다. 특히 과거 부여계냐 선비계냐를 놓고 논란이 많았던 유수 노하심 유적의 중층과 라마동 유적의 유물 양상이 상당히 유사하면서도 라마동 유적이 같은 시기 모용 선비 유적과 다르다는 점이 라마동 유적을 부여계로 판단한 한 근거가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라마동 유적에 대해서는
1. 중국의 일반 고고학자들이 먼저 라마동 유적의 유물/유구 양상이 모용 선비계 유적과 다르고 부여와 관계가 깊으므로 부여계 유적일 것이다라고 먼저 주장하고
2. 중국의 형질인류학자들이 라마동 유적의 인골 모양을 분석한 결과 역사상의 선비계와 다르고 현대 한국인과 유사하다는 결론을 내린 것입니다.
내년에도 좋은 글 많이 볼 수 있기 기대합니다 ;-)
연말 잘보내시고 내년에도 가족분들 모두 탈없이 건강하게 지내시길 바랍니다.
정말 좋은글 감사합니다.
역사를 어느 쪽도아닌 최대한 객관적인 시점으로 바라보시고 평하시는게 너무나도 대단하신거 같습니다.
항상 한국사에 관심을 두지만 어디서부터 공부를 해야할지 도통모르겠어서 그냥 인터넷이나 책을 조금씩 읽고있는데 여기서 좋은내용 많이배워가네요 (__)
좋은하루되세요^^
조선군 비판 부분에서 식민사관을 추종하는 분들이 즐거움을 표시하는 댓글이 많더군요.
헌데 한국인과 닮았다고 하면 중국 한족과는 다른 외형을 가진 골상이었다고 보아야 하는데, 그런 골상을 가졌다고 볼 수 있을만한 곳은 동해안, 남한지역으로 보면 강원 경상도 밖에 없지 않습니까?
실제로 부여의 고고학 유물과 순장 고분은 100% 경상도와 강원도에서만 나오고 있으니, 그 사람들이 남하했었을 것으로 보는 것도 전혀 억지스럽지 않고요.
고구려는 선비족, 백제는 중국 남조의 유물을 따르고 있는데 반해서 가야 신라의 경우에는 기마민족, 부여와 흉노의 유물이 복합적으로 출현하는 양상이죠. 그렇게 본다면 해당 중국 학자의 주장은 틀린 이야기입니다.
아마 해당 학자가 한반도의 지역별 유전자 자료를 구하지 못해 저런 주장을 했지 싶은데, 정확한 주장을 할려면 북표 라마동 부여인의 인골은 가야 신라인들과 가장 많이 닮아 있다라고 해야 되며, 오늘날로 치환해서 풀이하면 강원 경상도 사람들과 많이 닮아 있다라고 해야 정확하겠습니다.
즉다시말해서 현대 한국인 50프로는 중국산동종족이랑 아주흡사한거임
해서 북한주민하고 한국인 얼굴 뼈 키 골인 등 다 틀린겁니다